
사람들은 이해받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이해와 공감을 받기를 원한다. 자신의 힘듦과 고통을 ‘치유’라는 명목 아래 누군가가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화를 낸다.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느냐고, 왜 공감해주지 않느냐고. 특히 가족, 친구, 연인처럼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자신은 정작 이해와 공감을 건네지 못하면서, 받기만을 원한다는 것이다. 주지는 않고 받으려고만 하니, 관계는 점점 한쪽으로 기운다.
하지만 공감과 이해는 얻으려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강요해서 받아내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공감과 이해를 건네야, 비로소 나도 그것을 받을 수 있다.
제우스의 법, 그리고 문명의 시대
영화 ‘오디세이’에는 ‘제우스의 법’이라는 것이 나온다. 타인과 나의 생명을 동시에 저울에 올려놓고, 내가 먼저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고 타인이 그 친절을 받았다면, 그 타인은 주인의 물건에 손대지 않아야 한다는 법이다.
이 법이 지켜지던 시대를 사람들은 ‘문명의 시대’라 불렀다. 먼저 손 내미는 친절이 배신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믿음. 그 믿음이 사회를 지탱하던 시대다. 앞서 말한 ‘먼저 공감을 건네야 받을 수 있다’는 원리가, 곧 이 문명의 시대를 떠받치던 원리인 셈이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라는 지략으로 그 문명의 시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렸고, 스스로 야만의 시대를 연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미 야만의 시대에 산다
앞서 이야기한 사람들의 특징을 떠올려보면, 확실히 지금은 야만의 시대라는 말이 들어맞는다. 먼저 친절을 베푸는 대신 친절을 착취하고, 이해를 건네는 대신 이해를 요구한다. 먼저 손 내민 사람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시대. 문명의 시대는 이미 종말한 지 오래인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먼저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문명의 시대가 아직도 노래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래로만 남은 문명
‘오디세이’의 마지막, 서쪽의 미지의 땅을 향해 망망대해를 건너던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문명에 대한 이야기는 훗날 그저 노래로만 남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의 죄도 다시 한번 잊히겠지”라고.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랫동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답을 좇아온 감독이다. ‘인터스텔라’와 ‘오펜하이머’에서 보여줬듯, 주로 과학이라는 창을 통해서. 하지만 놀란은 끝내 그곳에서 답을 찾지 못한 듯하다. 어쩌면 그가 도달한 답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욕망의 존재이며, 그 욕망이 저지른 일들을 후회하고 성찰하는 존재라는 것.
오디세우스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자신의 지략으로 문명의 시대를 끝내고 야만의 시대를 열어버렸을 때, 그는 후회한다. 그리고 그 일이 잊히기를 바란다. 자신이 야만의 시대를 연 장본인이었음에도, 장본인이기 때문에.
놀란이 남긴 질문
여기서 나는 놀란이 오히려 문명의 시대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문명이 그저 노래로만 남게 된다는 말. 그건 뒤집어 보면, 문명의 시대가 지금도 노래로 불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죄와 함께 잊히더라도, 노래로 불리는 한 그 문명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먼저 친절을 베풀던 그 시대의 기억은, 노래라는 형태로 우리 곁에 끈질기게 남아 있는 것이다.
착취를 끝내는 자기 사랑
그렇다면 저스틴 비버의 ‘Love Yourself’는 이 이야기 속에서 어디쯤 놓이게 될까.
이 곡의 화자는 한 관계를 정리하는 중이다. 상대는 늘 화자의 일에 찬물을 끼얹고, 그의 이름을 이용하고, 그의 의견을 틀렸다고 몰아붙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잊게 만들었다. 화자를 자꾸만 작게 느끼게 했던 사람. 정확히, 앞서 말한 ‘이해는 주지 않고 받기만 원하던 사람’이다.
화자는 이제 담담히 말한다. 그렇게 네 모습이 좋거든, 그냥 너 자신이나 실컷 사랑하라고. 이것은 따뜻한 격려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상대를 향한 서늘한 작별의 말이다. 흥미로운 건 화자의 태도다. 그는 분노에 휩싸여 상대를 저주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 아무 감정도 남지 않았음을, 혼자일 때 오히려 더 편안함을 담담하게 고백할 뿐이다.
먼저 주되, 착취당하지는 않기
여기서 이 곡은 앞선 문명의 이야기에 중요한 균형추를 하나 달아준다.
‘먼저 이해하고 공감하자’는 문명의 원리는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이 ‘받기만 하는 사람에게 무한히 착취당하자’는 뜻은 아니다. 제우스의 법을 다시 떠올려보라. 그것은 친절을 받은 자가 배신하지 않는다는 상호성 위에 세워진 법이었다. 한쪽만 계속 베풀고 다른 쪽은 취하기만 한다면, 그건 이미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다.
‘Love Yourself’의 화자가 관계를 정리하는 건, 문명을 저버리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상호성이 깨진 관계, 즉 이미 야만이 되어버린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행위다. 먼저 벽을 허물고 마음을 내주었던 그가, 그 친절이 착취로 돌아왔음을 깨닫고 자신을 회복하는 이야기. 그것이 이 곡이 말하는 ‘자기 사랑’이다.
문명을 잇는 일과 나를 지키는 일
그러니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어야 한다.
하나는, 야만의 시대일지라도 먼저 이해하고 공감해보는 것이다. 노래로만 남은 그 문명의 역사를 끊기지 않게 이어가기 위해서.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그 작은 친절 하나가, 문명의 노래를 오늘도 계속 부르는 일이 된다.
다른 하나는, 그 친절을 착취하려는 사람 앞에서는 나를 지킬 줄 아는 것이다. 먼저 주되, 받기만 하는 사람에게 나를 소진시키지는 않는 것. ‘Love Yourself’가 보여주듯, 상호성이 무너진 관계를 놓아주는 것 역시 문명을 지키는 또 다른 방식이다.
결국 진짜 자기 사랑이란, 세상을 향해 먼저 마음을 열 줄 알면서도 그 마음이 함부로 짓밟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균형 위에 있는지도 모른다. 먼저 이해하고 공감하되,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 그렇게 우리는 노래로만 남은 문명을 이어가는 동시에, 그 노래를 부르는 ‘나’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