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이라는 것
세상에는 ‘사실’이라는 것이 있다. 처음에는 당사자만이 아는 사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알게 되는 사실이 되어버린다.
역사도 그렇다. 그 순간에는 오직 당사자만이 알던 일이, 시간이 흐르면 모든 사람이 아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 사실’이라 부르며, 마치 돌에 새겨진 것처럼 여긴다.
그런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역사는 과연 사실일까
역사는 정말 사실일까
기록이 있고, 사진이 있고, 영상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그게 사실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그게 바로 사실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기록’이다. 그리고 기록이라는 건 대개 주관적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 찍히고 적힌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반드시 발생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당사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지 못한다. 인터뷰가 있긴 하지만, 그 인터뷰조차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난 시점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기록하는 자의 눈에 담긴 것만이 남고, 그 프레임 바깥의 진실은 소리 없이 지워진다. 카메라가 어디를 향했는지에 따라, 펜을 쥔 손이 무엇을 적기로 했는지에 따라, 같은 사건도 전혀 다른 얼굴로 남는다.
역사는 정설의 집합이다
그래서 나는 역사라는 것이 결국 ‘정설의 집합’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실인지 명확하지 않고, 해석하는 관점 또한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설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정설이란 말 그대로 ‘정해진 말’이다. 사전적으로는 ‘바뀔 수 없는’이라는 뜻이 붙지만, 나는 여기에 의문을 품는다. 이 지구의 작은 미물에 불과한 인간이, 이 광대한 지구를, 하물며 자신들이 만들어낸 기술과 사건을 어떻게 감히 완벽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새로운 기록이 발견되고, 시대의 관점이 달라지면, 어제의 정설은 오늘의 오류가 되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를 떠올린다.
‘발해를 꿈꾸며’라는 선언
‘발해’라는 이름부터가 의미심장하다. 발해는 그 역사적 실체와 귀속을 두고 여전히 논쟁이 오가는, 어쩌면 가장 ‘정설이 흔들리는’ 왕국이다. 완전히 사실로 확정되지 못한 채, 우리의 기억과 염원 속에서 되살려지는 나라. 서태지는 하필 그 이름을 꺼내 들어, 잊히고 흐릿해진 역사를 다시 꿈꾸겠다고 선언한다.
이 곡이 실린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은, 그가 단순히 십 대에게 인기 있는 아이돌 가수가 아니라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의식 있는 뮤지션임을 대중에게 널리 각인시킨 작품이다. 앨범의 문을 여는 짧은 인트로 ‘Yo! Taiji’를 지나 두 번째로 놓인 이 곡은, 화려한 댄스 뮤직의 외피 안에 분단이라는 가장 무거운 현실을 품고 있었다.
반으로 갈린 몸, 현재진행형의 역사
‘발해를 꿈꾸며’가 그리는 분단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역사다.
노래는 묻는다. 한 민족의 형제인 우리가 서로를 겨누고 있는 이 현실을, 우리 몸이 반으로 갈린 채 살아가는 이 상황을, 정말 이대로 두어도 되는 것이냐고. 치유할 수 없는 아픔에 절규하는 우리를 지켜달라는 외침은, 분단이 완결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여전히 피 흘리는 현재임을 상기시킨다.
앞서 말한 ‘역사는 바뀔 수 있는 정설’이라는 생각이 여기서 힘을 얻는다. 분단 역시 하나의 역사적 상황일 뿐, 결코 영원히 정해진 사실이 아니다. 정설이 바뀔 수 있듯, 갈라진 땅의 경계선도 언젠가 사라질 수 있다. 이 곡은 그 가능성을 노래한다.
처절한 그날, 천만 인의 눈물
동시에 이 곡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도 분명히 새긴다. 전 인류가 살고 죽었던 그 처절한 날을, 그 비극의 기억을 잊었던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갈 수 없는 길 위에 뿌려진 천만 인의 눈물이 있다.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이산의 아픔. 이것은 통계나 기록으로는 결코 온전히 담기지 않는, 오직 당사자만이 아는 사실의 영역이다. 앞서 내가 ‘기록은 당사자의 이야기를 담지 못한다’고 말했던 그 빈자리를, 이 노래는 절규로 채워 넣는다. 역사서의 몇 줄로 요약될 수 없는 그 눈물을, 서태지는 노래라는 형식으로 기어이 살려낸다.
저 새들과 함께, 자유롭게
그럼에도 이 곡의 시선은 끝내 미래를 향한다.
화자는 저 하늘로 자유롭게, 새들과 함께 날고 싶다고 노래한다.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희망이 가득 담기기를 바란다. 젊은 우리의 힘이 모이면 세상을 흔들 수 있고, 서로 손을 맞잡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힘이 된다고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역사는 바뀔 수 있다’는 명제의 가장 아름다운 실천이다. 분단이라는 정설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대신,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를 함께 꿈꾸는 것. 이제는 함께 하나를 바라보며 나아가자는 마지막 다짐은, 정해진 역사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조용한 저항처럼 들린다.
노래로 이어지는 한, 끝나지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이 곡의 전곡이 마지막으로 라이브로 불린 것은 1995년 1월의 어느 무대였고, 그로부터 정확히 30년 뒤인 2025년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서태지는 그 무대의 고화질 영상을 세상에 다시 내놓았다. 마치 부르지는 못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해 달라는 듯이. 30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같은 노래가 다시 울려 퍼진 것이다.
이 장면은 앞선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처럼 느껴진다. 역사가 완결된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 이어 부르는 노래라면, 통일의 염원 또한 노래로 불리는 한 결코 끝나지 않는다. 발해가 노래 속에서 다시 꿈꾸어지듯, 하나 된 땅에 대한 소망도 이 곡이 불릴 때마다 되살아난다.
결국 ‘발해를 꿈꾸며’는 우리에게 말한다. 역사는 정해진 사실이 아니라 바뀔 수 있는 정설이며,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미래를 함께 꿈꾸고 노래하느냐에 따라 그 정설은 다시 쓰일 수 있다고. 갈라진 땅의 경계선이 사라지는 그날의 역사를, 지금 우리가 이 노래로 미리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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