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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태지와 아이들 ‘발해를 꿈꾸며’ – 역사는 사실인가, 우리가 이어 부르는 노래인가

    서태지와 아이들 3집 《발해를 꿈꾸며》 앨범 커버. 보랏빛으로 물든 거친 질감의 배경 위로, 새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날아오르는 모습이 담겨 있다. 상단에는 'SEOTAIJI AND BOYS III'라는 영문 제목이 새겨져 있다. 자유롭게 비상하는 평화의 상징 비둘기는, 분단을 넘어 통일과 자유를 염원하는 타이틀곡 '발해를 꿈꾸며'의 메시지를 그대로 시각화한다.
    서태지와 아이들 《발해를 꿈꾸며》 (1994) 앨범 커버

    사실이라는 것

    세상에는 ‘사실’이라는 것이 있다. 처음에는 당사자만이 아는 사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알게 되는 사실이 되어버린다.

    역사도 그렇다. 그 순간에는 오직 당사자만이 알던 일이, 시간이 흐르면 모든 사람이 아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 사실’이라 부르며, 마치 돌에 새겨진 것처럼 여긴다.

    그런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역사는 과연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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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정말 사실일까

    기록이 있고, 사진이 있고, 영상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그게 사실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그게 바로 사실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기록’이다. 그리고 기록이라는 건 대개 주관적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 찍히고 적힌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반드시 발생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당사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지 못한다. 인터뷰가 있긴 하지만, 그 인터뷰조차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난 시점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기록하는 자의 눈에 담긴 것만이 남고, 그 프레임 바깥의 진실은 소리 없이 지워진다. 카메라가 어디를 향했는지에 따라, 펜을 쥔 손이 무엇을 적기로 했는지에 따라, 같은 사건도 전혀 다른 얼굴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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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정설의 집합이다

    그래서 나는 역사라는 것이 결국 ‘정설의 집합’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실인지 명확하지 않고, 해석하는 관점 또한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설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정설이란 말 그대로 ‘정해진 말’이다. 사전적으로는 ‘바뀔 수 없는’이라는 뜻이 붙지만, 나는 여기에 의문을 품는다. 이 지구의 작은 미물에 불과한 인간이, 이 광대한 지구를, 하물며 자신들이 만들어낸 기술과 사건을 어떻게 감히 완벽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새로운 기록이 발견되고, 시대의 관점이 달라지면, 어제의 정설은 오늘의 오류가 되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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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를 꿈꾸며’라는 선언

    ‘발해’라는 이름부터가 의미심장하다. 발해는 그 역사적 실체와 귀속을 두고 여전히 논쟁이 오가는, 어쩌면 가장 ‘정설이 흔들리는’ 왕국이다. 완전히 사실로 확정되지 못한 채, 우리의 기억과 염원 속에서 되살려지는 나라. 서태지는 하필 그 이름을 꺼내 들어, 잊히고 흐릿해진 역사를 다시 꿈꾸겠다고 선언한다.

    이 곡이 실린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은, 그가 단순히 십 대에게 인기 있는 아이돌 가수가 아니라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의식 있는 뮤지션임을 대중에게 널리 각인시킨 작품이다. 앨범의 문을 여는 짧은 인트로 ‘Yo! Taiji’를 지나 두 번째로 놓인 이 곡은, 화려한 댄스 뮤직의 외피 안에 분단이라는 가장 무거운 현실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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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으로 갈린 몸, 현재진행형의 역사

    ‘발해를 꿈꾸며’가 그리는 분단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역사다.

    노래는 묻는다. 한 민족의 형제인 우리가 서로를 겨누고 있는 이 현실을, 우리 몸이 반으로 갈린 채 살아가는 이 상황을, 정말 이대로 두어도 되는 것이냐고. 치유할 수 없는 아픔에 절규하는 우리를 지켜달라는 외침은, 분단이 완결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여전히 피 흘리는 현재임을 상기시킨다.

    앞서 말한 ‘역사는 바뀔 수 있는 정설’이라는 생각이 여기서 힘을 얻는다. 분단 역시 하나의 역사적 상황일 뿐, 결코 영원히 정해진 사실이 아니다. 정설이 바뀔 수 있듯, 갈라진 땅의 경계선도 언젠가 사라질 수 있다. 이 곡은 그 가능성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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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절한 그날, 천만 인의 눈물

    동시에 이 곡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도 분명히 새긴다. 전 인류가 살고 죽었던 그 처절한 날을, 그 비극의 기억을 잊었던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갈 수 없는 길 위에 뿌려진 천만 인의 눈물이 있다.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이산의 아픔. 이것은 통계나 기록으로는 결코 온전히 담기지 않는, 오직 당사자만이 아는 사실의 영역이다. 앞서 내가 ‘기록은 당사자의 이야기를 담지 못한다’고 말했던 그 빈자리를, 이 노래는 절규로 채워 넣는다. 역사서의 몇 줄로 요약될 수 없는 그 눈물을, 서태지는 노래라는 형식으로 기어이 살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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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새들과 함께, 자유롭게

    그럼에도 이 곡의 시선은 끝내 미래를 향한다.

    화자는 저 하늘로 자유롭게, 새들과 함께 날고 싶다고 노래한다.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희망이 가득 담기기를 바란다. 젊은 우리의 힘이 모이면 세상을 흔들 수 있고, 서로 손을 맞잡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힘이 된다고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역사는 바뀔 수 있다’는 명제의 가장 아름다운 실천이다. 분단이라는 정설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대신,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를 함께 꿈꾸는 것. 이제는 함께 하나를 바라보며 나아가자는 마지막 다짐은, 정해진 역사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조용한 저항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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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로 이어지는 한, 끝나지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이 곡의 전곡이 마지막으로 라이브로 불린 것은 1995년 1월의 어느 무대였고, 그로부터 정확히 30년 뒤인 2025년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서태지는 그 무대의 고화질 영상을 세상에 다시 내놓았다. 마치 부르지는 못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해 달라는 듯이. 30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같은 노래가 다시 울려 퍼진 것이다.

    이 장면은 앞선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처럼 느껴진다. 역사가 완결된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 이어 부르는 노래라면, 통일의 염원 또한 노래로 불리는 한 결코 끝나지 않는다. 발해가 노래 속에서 다시 꿈꾸어지듯, 하나 된 땅에 대한 소망도 이 곡이 불릴 때마다 되살아난다.

    결국 ‘발해를 꿈꾸며’는 우리에게 말한다. 역사는 정해진 사실이 아니라 바뀔 수 있는 정설이며,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미래를 함께 꿈꾸고 노래하느냐에 따라 그 정설은 다시 쓰일 수 있다고. 갈라진 땅의 경계선이 사라지는 그날의 역사를, 지금 우리가 이 노래로 미리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저스틴 비버 ‘Love Yourself’ – 문명을 잇는 일과 나를 지키는 일 사이에서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의 3집 정규앨범 《Purpose》 커버. 흑백 톤 위로 상반신을 드러낸 그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십자가와 로마 숫자, 낙서처럼 겹쳐진 문양들이 배경을 채우며, 회개와 구원, 삶의 목적을 찾으려는 앨범의 주제 의식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Love Yourself', 'Sorry' 등이 수록된 그의 대표작이다.
    저스틴 비버 《Purpose》 (2015) 앨범 커버

    사람들은 이해받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이해와 공감을 받기를 원한다. 자신의 힘듦과 고통을 ‘치유’라는 명목 아래 누군가가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화를 낸다.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느냐고, 왜 공감해주지 않느냐고. 특히 가족, 친구, 연인처럼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자신은 정작 이해와 공감을 건네지 못하면서, 받기만을 원한다는 것이다. 주지는 않고 받으려고만 하니, 관계는 점점 한쪽으로 기운다.

    하지만 공감과 이해는 얻으려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강요해서 받아내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공감과 이해를 건네야, 비로소 나도 그것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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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우스의 법, 그리고 문명의 시대

    영화 ‘오디세이’에는 ‘제우스의 법’이라는 것이 나온다. 타인과 나의 생명을 동시에 저울에 올려놓고, 내가 먼저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고 타인이 그 친절을 받았다면, 그 타인은 주인의 물건에 손대지 않아야 한다는 법이다.

    이 법이 지켜지던 시대를 사람들은 ‘문명의 시대’라 불렀다. 먼저 손 내미는 친절이 배신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믿음. 그 믿음이 사회를 지탱하던 시대다. 앞서 말한 ‘먼저 공감을 건네야 받을 수 있다’는 원리가, 곧 이 문명의 시대를 떠받치던 원리인 셈이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라는 지략으로 그 문명의 시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렸고, 스스로 야만의 시대를 연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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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미 야만의 시대에 산다

    앞서 이야기한 사람들의 특징을 떠올려보면, 확실히 지금은 야만의 시대라는 말이 들어맞는다. 먼저 친절을 베푸는 대신 친절을 착취하고, 이해를 건네는 대신 이해를 요구한다. 먼저 손 내민 사람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시대. 문명의 시대는 이미 종말한 지 오래인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먼저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문명의 시대가 아직도 노래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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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로만 남은 문명

    ‘오디세이’의 마지막, 서쪽의 미지의 땅을 향해 망망대해를 건너던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문명에 대한 이야기는 훗날 그저 노래로만 남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의 죄도 다시 한번 잊히겠지”라고.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랫동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답을 좇아온 감독이다. ‘인터스텔라’와 ‘오펜하이머’에서 보여줬듯, 주로 과학이라는 창을 통해서. 하지만 놀란은 끝내 그곳에서 답을 찾지 못한 듯하다. 어쩌면 그가 도달한 답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욕망의 존재이며, 그 욕망이 저지른 일들을 후회하고 성찰하는 존재라는 것.

    오디세우스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자신의 지략으로 문명의 시대를 끝내고 야만의 시대를 열어버렸을 때, 그는 후회한다. 그리고 그 일이 잊히기를 바란다. 자신이 야만의 시대를 연 장본인이었음에도, 장본인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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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란이 남긴 질문

    여기서 나는 놀란이 오히려 문명의 시대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문명이 그저 노래로만 남게 된다는 말. 그건 뒤집어 보면, 문명의 시대가 지금도 노래로 불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죄와 함께 잊히더라도, 노래로 불리는 한 그 문명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먼저 친절을 베풀던 그 시대의 기억은, 노래라는 형태로 우리 곁에 끈질기게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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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취를 끝내는 자기 사랑

    그렇다면 저스틴 비버의 ‘Love Yourself’는 이 이야기 속에서 어디쯤 놓이게 될까.

    이 곡의 화자는 한 관계를 정리하는 중이다. 상대는 늘 화자의 일에 찬물을 끼얹고, 그의 이름을 이용하고, 그의 의견을 틀렸다고 몰아붙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잊게 만들었다. 화자를 자꾸만 작게 느끼게 했던 사람. 정확히, 앞서 말한 ‘이해는 주지 않고 받기만 원하던 사람’이다.

    화자는 이제 담담히 말한다. 그렇게 네 모습이 좋거든, 그냥 너 자신이나 실컷 사랑하라고. 이것은 따뜻한 격려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상대를 향한 서늘한 작별의 말이다. 흥미로운 건 화자의 태도다. 그는 분노에 휩싸여 상대를 저주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 아무 감정도 남지 않았음을, 혼자일 때 오히려 더 편안함을 담담하게 고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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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주되, 착취당하지는 않기

    여기서 이 곡은 앞선 문명의 이야기에 중요한 균형추를 하나 달아준다.

    ‘먼저 이해하고 공감하자’는 문명의 원리는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이 ‘받기만 하는 사람에게 무한히 착취당하자’는 뜻은 아니다. 제우스의 법을 다시 떠올려보라. 그것은 친절을 받은 자가 배신하지 않는다는 상호성 위에 세워진 법이었다. 한쪽만 계속 베풀고 다른 쪽은 취하기만 한다면, 그건 이미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다.

    ‘Love Yourself’의 화자가 관계를 정리하는 건, 문명을 저버리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상호성이 깨진 관계, 즉 이미 야만이 되어버린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행위다. 먼저 벽을 허물고 마음을 내주었던 그가, 그 친절이 착취로 돌아왔음을 깨닫고 자신을 회복하는 이야기. 그것이 이 곡이 말하는 ‘자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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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을 잇는 일과 나를 지키는 일

    그러니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어야 한다.

    하나는, 야만의 시대일지라도 먼저 이해하고 공감해보는 것이다. 노래로만 남은 그 문명의 역사를 끊기지 않게 이어가기 위해서.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그 작은 친절 하나가, 문명의 노래를 오늘도 계속 부르는 일이 된다.

    다른 하나는, 그 친절을 착취하려는 사람 앞에서는 나를 지킬 줄 아는 것이다. 먼저 주되, 받기만 하는 사람에게 나를 소진시키지는 않는 것. ‘Love Yourself’가 보여주듯, 상호성이 무너진 관계를 놓아주는 것 역시 문명을 지키는 또 다른 방식이다.

    결국 진짜 자기 사랑이란, 세상을 향해 먼저 마음을 열 줄 알면서도 그 마음이 함부로 짓밟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균형 위에 있는지도 모른다. 먼저 이해하고 공감하되,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 그렇게 우리는 노래로만 남은 문명을 이어가는 동시에, 그 노래를 부르는 ‘나’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 오아시스 ‘Don’t Look Back in Anger’ – 분노로 뒤돌아보지 않는 법

    오아시스(Oasis)의 2집 정규앨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커버. 런던 소호의 버윅 스트리트를 배경으로, 두 인물이 엇갈려 지나가는 순간이 흐릿하게 포착되어 있다. 물기 어린 거리와 흐린 하늘, 그리고 초점이 나간 인물들은 어디론가 향하는 청춘의 불확실함과 몽롱한 분위기를 담아낸다. 'Don't Look Back in Anger'가 수록된, 브릿팝을 대표하는 명반의 상징적 이미지다.
    오아시스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1995) 앨범 커버

    사람은 타인의 시선을 산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지독하게 신경 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무서울 만큼. 그래서 관계에 아주 작은 흠이라도 보이면 불안해지고, ‘저 사람이 나를 안 좋게 생각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관계가 이어지는 매 순간마다 우리는 긴장하고,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상대의 표정을 살피고, 내가 한 말이 어떻게 들렸을지를 곱씹는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혼자 집에 돌아오면, 평소보다 훨씬 더 힘들고 더 지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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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프로이트를 만나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 좋은 관계란 몇 명과의 깊고 오랜 관계면 충분하다.

    돌아보니 나는 무의식에서 나오는 말들을 고스란히 나의 의식에 담아 사람들의 시선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정작 힘들어하는 나의 내면은 조금도 돌보지 않은 채로. 그래서 이제는 나도 챙기려 한다. 남의 시선에 조금은 덜 신경 쓰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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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내면서 뒤돌아보지 마’

    흥미롭게도, 오아시스(Oasis)의 ‘Don’t Look Back in Anger’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하는 곡처럼 들린다.

    노엘 갤러거가 쓴 이 곡은,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라는 나직한 권유로 문을 연다. 네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다고 말했던 그곳에서, 지금껏 봐 왔던 것들이 조금씩 바래져 간다고. 그리고 화자는 선언한다. 나는 침대 위에서 혁명을 시작하겠다고. 누군가 나를 두고 잘난 척한다고 비웃었기에, 오히려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맞서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그런 표정 좀 짓지 말라며 건네는 한마디다. 넌 결코 내 마음을 태워버릴 수 없을 거라고. 이것은 타인의 시선과 판단이 나를 무너뜨리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단단한 다짐이다. 앞서 내가 ‘남의 시선에 덜 신경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과, 이 곡의 태도는 정확히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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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대에서 시작하는 혁명

    거창한 무대나 광장이 아니라, 가장 사적이고 지친 몸을 누이는 침대에서. 세상의 시선에 하루 종일 시달리다 돌아와 무너지듯 눕는 바로 그 자리에서, 화자는 오히려 반란을 시작한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공격적인 혁명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조용한 혁명이다.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던 나를 놓아주고, 지친 내면을 먼저 돌보기로 하는 것. 그러니 이 곡이 반복해서 말하는 ‘화내며 뒤돌아보지 말라’는 후렴은, 지나간 관계와 상처를 원망하며 곱씹는 대신 그것을 담담히 흘려보내라는 다정한 처방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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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lly라는 이름, 그리고 어떤 이별

    이 곡의 후렴에는 ‘Sally’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샐리는 기다릴 수 있다고,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가 스쳐 지나갈 때 그녀의 영혼이 사라져가도 화내면서 돌아보지는 말라고.

    나는 이 대목을 한 편의 이별 이야기로 읽었다. 그는 그녀를 마음속까지 이해했고, 그녀에게 완벽한 남자로 보이고 싶었으며, 무르익은 사랑 속에서 진심을 느꼈다. 그녀가 보인 무수한 표정들도 그에게는 단 하나의 흠집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이별했다.

    그런데 그는 절대 그리워하거나 외로워하지 않는다. 이유가 있다. 그가 떠나는 그녀를 불렀을 때, 그녀는 화를 내며 끝이라고 돌아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했던 약속을 끝까지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분노로 관계를 끝맺지 않은 이별. 그래서 ‘Sally는 기다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서로를 원망으로 태워버리지 않았기에, 그 관계는 끝나고도 어딘가에 온전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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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릴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운명

    여기서 이 곡은 사랑에 대한 근사한 질문 하나를 남긴다. 당신에게도, 내가 기꺼이 ‘Sally’가 되어주어도 충분한 사람이 있었는가.

    꼭 다시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드는 사람. 설령 지금은 멀어졌더라도 분노가 아니라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는 사람. 어쩌면 그런 사람을 만나는 일, 아니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운명이 아닐까. 분노로 돌아서지 않는 이별이 가능한 관계란, 애초에 서로를 깊이 존중했던 사이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가사는 오묘한 구석이 가득해서, 샐리가 누구인지조차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원래 이런 노래는 보는 사람의 마음이다. 정해진 정답이 없기에, 저마다 자신의 이별과 자신의 샐리를 이 노래 위에 겹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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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만은, 뒤돌아보지 않기로

    이 노래는 분노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선다. 곡은 상처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상처를 분노로 되새기며 과거에 갇히는 대신, 담담히 앞으로 걸어가자고 말한다.

    타인의 시선에 지쳐 나를 잃어가던 사람에게도, 사랑하는 이와 이별한 사람에게도 이 곡의 처방은 같다. 지나간 것을 원망으로 붙들지 말 것. 나를 태워버리려는 것들로부터 내 마음을 지킬 것. 그리고 나를 먼저 챙길 것.

    그 모든 다짐이 버거운 날에도, 이 노래는 마지막에 가장 인간적인 한 줄을 남긴다. 적어도 오늘만은, 분노로 뒤돌아보지 말자고. 완벽하게 초연해지지 못해도 괜찮다. 오늘 하루만 그렇게 살아내면, 그 하루가 쌓여 언젠가 우리는 정말로 뒤돌아보지 않게 될 테니까.

  • 제니 twin 가사 해석, 10년 우정이 남긴 이름 하나

    검은 배경 위, 붉은 단발머리의 제니가 눈을 감은 채 붉은 커튼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붉은 천이 드리워진 무대 위에 선 그녀의 이미지는 '온 세상은 무대'라는 앨범의 연극적 콘셉트를 상징하며, 각 막을 여는 붉은 커튼이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좌우에 필기체로 적힌 'Jennie'와 'Ruby'가 앨범의 정체성을 완성한다. 제니 twin
    제니 《Ruby》 (2025) 앨범 커버

    제니 twin 가사 해석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습니다. 이 곡을 제대로 읽으려면 그 이야기를 먼저 지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니 twin 가사를 애칭이라는 이름의 의미로 읽습니다. 앨범 Ruby의 연극적 콘셉트와 멀어진 우정을 편지처럼 부르는 이 곡의 방식까지 함께 짚었습니다.

    <목차>

    1. 애칭은 왜 단순한 애정 표현이 아닌가
    2. 이름은 나를 정의하지 못하지만, 나를 빚어냅니다
    3. 앨범 《Ruby》의 연극적 콘셉트와 twin이 놓인 자리
    4. 제니 twin 가사는 제목에서부터 시작합니다
    5. 제니 twin 가사가 그리는 멀어진 우정의 편지
    6. 밝게 부를수록 더 짙어지는 소리의 역설
    7. 제니 twin 가사가 지금 우리에게 남기는 것
    8. 그래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를 지키는 일입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한 사람이 창가에 홀로 서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 실루엣. 창을 통해 들어온 푸른 저녁 빛이 어깨선을 따라 흐르고, 방의 나머지 공간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다. 얇은 커튼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유리에는 인물의 흐릿한 반영이 비친다. 이름을 부를 사람이 더는 곁에 없는 방의 고요를 담은 이미지로, 글의 도입부 정서를 시각화한다.

    애칭은 왜 단순한 애정 표현이 아닌가

    애칭은 본래의 이름 외에, 친근하고 다정하게 부를 때 쓰는 이름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며 자기 이름이 아닌 이름으로 불릴 때가 있습니다. 가족에게든 연인에게든, 친구나 직장 동료에게든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내가 누군가를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이 행위가 단순한 애정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냥 친해서, 좋아서, 사랑해서라는 이유만으로 애칭을 부르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애칭에는 그보다 훨씬 깊은 무언가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름이라는 것부터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두운 객석에서 바라본 텅 빈 무대. 양옆으로 묵직한 진홍색 벨벳 커튼이 주름을 드리운 채 걷혀 있고, 맨 나무 바닥 한가운데에 따뜻한 조명 하나만이 둥글게 내려앉아 있다. 그 빛 안에 서 있는 사람은 없고, 광선 사이로 미세한 먼지만 떠다닌다. 연기가 모두 끝난 뒤 가장 사적인 이름 하나만 남은 자리를 상징하는 이미지다.

    이름은 나를 정의하지 못하지만, 나를 빚어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진 이름으로 불리고, 대부분 그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설령 나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더라도, 내 이름은 온전히 나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곧 ‘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이름을 체화하는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껍데기를 오랜 시간 몸에 두르며, 그것을 나 자신이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름이 ‘나’를 온전히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름 역시 결국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게 보면 한 사회가 역사와 효율성을 위해 만들어낸 장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역설이 생깁니다. 이름이 나를 정의하지 못한다면 하찮은 것일까요. 저는 오히려 정반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체화하기 때문입니다. 상처 주는 별명으로 오래 불린 사람이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게 되는 것처럼, 이름은 나를 정의하지 못하면서도 결국 나를 빚어냅니다.

    애칭은 두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세계의 증표입니다

    특히 애칭은 누군가가 오직 나만을 위해 지어 건넨 이름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고, 그 사람과 나 사이에서만 통용되던 단어. 저는 애칭을 하나의 작은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지은 언어이자, 그 관계가 존재했다는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칭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호칭 하나가 사라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과 함께 쌓아 올린 세계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는 일입니다.

    앨범 《Ruby》의 연극적 콘셉트와 twin이 놓인 자리

    이 곡이 실린 제니의 첫 정규 앨범 《Ruby》는 2025년 3월 7일 발매되었으며, 총 15곡 41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애플뮤직 인터뷰에 따르면 이 앨범은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 중 하나인 『뜻대로 하세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제니는 처음 그 제목을 보고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고 있었구나 생각했고, 이후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온전히 자신이 원하는 앨범을 만들었다고 밝혔습니다.

    앨범명 《Ruby》는 그녀의 미들네임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름을 앨범 제목으로 삼은 작품 안에, 누군가의 애칭을 제목으로 삼은 곡이 놓여 있는 셈입니다.

    앨범이 연극에서 출발한 만큼, 각 막을 여는 의미의 붉은 커튼이 상징으로 쓰입니다. 차일디시 감비노, 도이치, 도미닉 파이크, 두아 리파, FKJ, 칼리 우치스가 피처링에 참여했습니다.

    여러 얼굴을 연기하는 이 무대의 끝자락에서, twin은 화려한 연기를 잠시 멈추고 가장 사적인 이름 하나를 조용히 부르는 순간처럼 놓여 있습니다.

    제니 twin 가사는 제목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제니 twin 가사에서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것은 제목입니다.

    ‘twin’은 단순히 쌍둥이라는 뜻의 단어가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누군가의 애칭으로 읽었습니다. 한때 나와 쌍둥이처럼 닮아 있던 사람, 그래서 twin이라 부르던 그 누군가 말입니다.

    그 사람은 이제 떠났습니다. 화자는 그를 그리워하며 이름에 가까운 그 애칭을 부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애칭이 두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던 세계의 증표라면, 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미 사라진 세계를 잠시나마 다시 불러오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짧은 단어의 반복이 그토록 아프게 들리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두운 나무 책상 위에 놓인 낡은 크림색 편지 봉투. 가장자리가 닳아 살짝 말려 있고, 그 옆에는 접힌 편지지가 펼쳐져 있다. 필기체 글씨는 흐릿하게 번져 읽을 수 없고 잉크는 세피아빛으로 바랬다. 마른 꽃잎 한 장과 옅은 찻잔 자국이 곁에 남아 있다.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이미 멀어진 사람에게 쓰인 노래라는 곡의 성격을 담아낸 정물 이미지다.

    제니 twin 가사가 그리는 멀어진 우정의 편지

    이 곡은 사랑 노래라기보다 멀어진 우정을 향한 노래에 가깝습니다. 한 음악 평론에서도 이 곡을 깨진 우정을 향한 진심 어린 편지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

    화자는 마치 편지를 쓰듯 이 노래를 써 내려갑니다. 너무 오래 멀어졌다는 것을 알기에, 유리병에 담아 바다에 띄워 보내는 편지처럼 말입니다.

    십 년을 함께한, 어리고 철없고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둘 다 조금씩 어긋나 있었음을 화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시기를 탓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문제는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자꾸만 다투고 부딪히던 두 사람은 별들 아래 흩어지는 흰 구름처럼 서서히 멀어져 갔습니다.

    관계를 끝내는 대신 화해를 미뤄두는 방식

    그럼에도 화자는 그를 완전히 떠나보내지 않습니다. 좋아하던 음악을 틀어놓고 앉아 있을 때면 여전히 그가 보이고, 곁에 없어도 여전히 그를 안다고 말합니다.

    언젠가 좀 더 나이가 들어 다시 만나면 어긋났던 모든 것을 바로잡자고 합니다. 저는 이 대목이 이 곡에서 가장 다정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계를 끝내는 대신, 화해를 미래로 미뤄두는 방식이니까요.

    이렇게 곁에 있어 달라고 청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이전에 블랙핑크 ‘STAY’를 다루며 쓴 글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붙잡고 싶을 때 사람의 말은 오히려 작아지는 것 같습니다.

    밝게 부를수록 더 짙어지는 소리의 역설

    이 곡의 사운드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들은 것은 반복의 방식입니다.

    twin이라는 단어가 짧게 세 번씩 끊어져 반복될 때, 그 발성은 무겁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볍고 경쾌합니다. 편지를 쓰듯 노래를 쓰고 있다는 구절 역시 담담한 어조로 되풀이됩니다. 울먹이는 대신 말하듯 흘려보내는 창법입니다.

    저는 이것이 이 곡의 가장 정교한 장치라고 봅니다. 목이 메어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더 명쾌하게 부르는 것. 그 부름이 밝게 들릴수록, 밝음 뒤에 감춰진 그리움은 더 짙어집니다.

    슬픔을 슬프게 부르면 슬픔은 거기서 끝납니다. 그러나 슬픔을 밝게 부르면, 듣는 사람이 그 간극을 스스로 채워 넣게 됩니다. 그 간극에서 이 곡의 정서가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니 twin 가사가 지금 우리에게 남기는 것

    이 곡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 대부분이 비슷한 이름 하나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때 나를 그렇게 불러주던 사람. 지금은 연락도 하지 않지만, 그 호칭만은 여전히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는 관계.

    연인과의 이별은 자주 노래가 되지만, 친구와의 멀어짐은 그렇지 않습니다. 명확한 이별 통보도, 헤어진 날짜도 없이 그저 서서히 옅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곡이 바로 그 이름 없는 상실을 다룬다는 점에서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라진 사람의 흔적 안에서 하루를 반복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넬 ‘기억을 걷는 시간’을 다루며 쓴 글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딱 한 곡의 길이만큼 되살려보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빅뱅 ‘LAST DANCE’를 다룬 글에서 다뤘습니다.

    세 곡 모두 같은 자리에 서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끝난 것을 붙잡는 대신, 그것을 부를 방법을 찾는 자리 말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를 지키는 일입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름은 나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저의 답은 아니오입니다. 이름과 애칭은 인간이 만든 그릇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그릇을 오래 체화하며 살고, 그렇기에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끝내 잊지 못합니다. 떠난 이의 애칭을 잊지 않고 부른다는 것은, 그와 함께한 시절의 ‘나’를 온전한 채로 간직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밝게 반복되는 그 짧은 애칭은, 어쩌면 가장 조용한 형태의 그리움이자 가장 단단한 형태의 사랑일지도 모릅니다.

    전곡은 벅스 twin 페이지 제니 twin 가사 해석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해석이므로, 여러분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https://music.bugs.co.kr/track/6292531

    https://www.melon.com/musicstory/detail.htm?mstorySeq=1589

  • 양홍원 ‘사계’ – 책임을 진다는 것, 그리고 한 번의 기회에 대하여

    흩어진 걸음의 실루엣들이 검은 줄무늬 사이를 지난다. 앞으로 세 걸음, 뒤로 두 걸음, 결국 한 발짝 나아가는 그 더딘 전진이, 제목 《오보에》에 고스란히 접혀 있다. 나무로 된 악기이자, 자기 자신이자, 그를 둘러싼 오보(誤報)까지 끌어안은 양홍원의 두 번째 정규작.
    양홍원 《오보에》 (2021) 앨범 커버

    모든 말과 행동 뒤에는 책임이 따른다

    모든 행동과 말 뒤에는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 그 책임은 깃털처럼 가벼울 수도 있고, 매일 지구를 떠받치는 거인의 고통처럼 한없이 무거울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은 종종 자신이 이미 저지른 행동과 입 밖으로 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든다. 일종의 방어기제다. 분명 내가 한 일인데도 어쩐지 나는 전혀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속인다. 절대 그러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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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정하는 소수, 그리고 등을 돌리는 대중

    그럼에도 소수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한다. 깊이 반성하고, 사과한다. 그러나 대중은 종종 그들에게서 눈을 돌린다. ‘뭐, 그래봤자 똑같지’라고 생각하면서.

    물론 잘못은 잘못이다. 잘못된 일이라면 마땅히 비난받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특히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일이라면, 그 상처를 받은 사람의 시간과 아픔이 가장 먼저 존중받아야 한다. 그 사실은 어떤 반성으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그 모든 전제가 지켜진 위에서라면, 한 번쯤은 다시 볼 여지를 남겨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진심으로 반성하고, 분명히 죗값을 치르고, 그 이후에 보여주는 모습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면. 딱 한 번쯤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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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세 걸음, 뒤로 두 걸음

    ‘사계’가 실린 양홍원의 정규 2집 ‘오보에’는 그 자체로 이런 이야기를 품은 앨범이다. 영문 제목인 ‘3 STEPS FORWARD, 2 STEPS BACK’, 즉 앞으로 세 걸음 나아갔다가 뒤로 두 걸음 물러난다는 말은 곧 ‘잘못된 걸음’을 뜻하기도 한다. 제목 ‘오보에’가 잘못된 정보를 뜻하는 ‘오보’와 겹쳐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간은 늘 세 걸음 나아가고 두 걸음 물러서며 산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잘못된 걸음을 딛는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럼에도 결국 한 걸음은 앞으로 남는다는 사실이다. 이 앨범은 완벽하게 나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비틀거리면서도 기어이 나아가는 사람의 기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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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홍원을 향한 시선이 바뀐 순간

    래퍼 중에 양홍원이라는 사람이 있다. 솔직히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를 썩 좋게 보지 않았다. 학교폭력 논란 때문이었다. 그 일이 마음에 걸려, 그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 그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그가 올린 육아 콘텐츠를 보고 난 뒤였다. 영상 속 그의 모습을 보며, 이 사람이 적어도 ‘책임’ 하나만큼은 지려는 사람이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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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일곱,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무게

    알려진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 한 아이의 부모라고 하기엔 분명 어린 나이다. 그럼에도 영상 속에서 보이는 모습은 영락없이 한 아이를 책임지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음악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활동해야 할 나이에, 그 무게까지 함께 짊어지고 산다는 것. 어떻게 보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회피가 가장 쉬운 선택인 순간에, 그는 도망치는 대신 짊어지는 쪽을 택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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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계’가 말하는 책임과 시간

    그런 시선으로 다시 들은 ‘사계’는 전과 다르게 다가왔다. 이 곡에서 그는 어긋나고 꿰매어도 자꾸만 따가운 관계, 제자리를 맴도는 시계 같은 시간, 그럼에도 미워하기보다 먼저 안아버리는 마음을 담담히 그려낸다.

    특히 인상적인 건, 단 1초라도 상대를 미워하지 않겠다며 아이처럼 자신이 먼저 끌어안겠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미움을 붙들고 있는 대신 먼저 손을 내미는 것. 그것 역시 관계에 대한 책임의 한 형태다. 희생을 ‘기록이라는 핑계’로 적어 내려간다는 자조 섞인 고백에서는, 예술이라는 이름의 이기심과 그럼에도 무언가를 감당하려는 마음 사이에서 흔들리는 한 인간이 보인다.

    돌아오는 것은 오직 사계뿐이라는 후렴은, 결국 시간은 계절처럼 정직하게 흐를 뿐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사람은 바뀔 수 있을까. 이 곡은 답을 내리는 대신, 그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자신을 기록해둔다.

    ​

    변화는 말이 아니라 시간으로 증명된다

    나는 여전히 잘못은 잘못이라고 믿는다. 그 상처를 가볍게 여길 생각은 없다. 다만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함부로 닫아버리고 싶지 않다.

    변화는 사과의 말 한마디가 아니라, 그 이후에 쌓이는 시간으로 증명된다. 세 걸음 나아갔다 두 걸음 물러서더라도, 그 한 걸음의 차이가 매일 쌓이면 사람은 분명 다른 자리에 서 있게 된다. 양홍원이 짊어진 가장의 무게와 ‘사계’라는 곡이 내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진짜 책임이란 도망치지 않고 매일의 시간을 견디며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 긴 증명을 지켜보는 일 역시, 어쩌면 우리 몫의 책임일지도 모른다.

  • 블랙핑크 ‘STAY’ – 혼자 빛나는 사람도, 결국 한 명의 인간이기에

    블랙핑크 두 번째 싱글 앨범 SQUARE TWO 커버
검은 여백 위, 분홍빛 한 장이 조용히 넘어가는 순간 SQUARE TWO
블랙과 핑크의 대비처럼, 강렬함과 사랑스러움 사이  블랙핑크 SQUARE TWO
    블랙핑크 《SQUARE TWO》 (2016) 앨범 커버 ⓒYG엔터테인먼트

    혼자일 때 빛나는 사람들

    세상에는 혼자일 때 유난히 빛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대부분의 일을 혼자 해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마치 인간이 아닌 존재처럼 높이 치켜세우며, 무엇을 하든 “역시~”라는 말을 붙인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 사람도 인간이라는 것. 그러니 어떤 날은 해내지 못할 수도 있고, 어떤 날은 실수할 수도 있다. 어떤 날은 누군가를 만나고 싶을 수도, 또 어떤 날은 아무 관심도 받지 않은 채 그저 편히 쉬고 싶을 수도 있다. 그것은 결함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당연한 결이다.

    ​

    인간이라는 이유로 실망당하는 사람들

    그런데 대중은 바로 그 지점에서 그에게 실망한다. 변했다고 말하고, 다시 돌아오라며 욕하고, 기만당했다고 여긴다. 완벽한 존재로 세워두었던 사람이 인간의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 역시 어엿한 인간성을 지닌, 존중받아 마땅한 한 명의 ‘사람’이다. 그를 향해 실망하고 욕하는 대중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똑같은 사람. 대중은 그를 충분히 한 인간으로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무대 위의 빛나는 존재이기 이전에, 지치면 쉬고 싶고 곁을 원하는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그리고, ‘STAY’

    블랙핑크의 ‘STAY’를 이런 시선으로 듣기 시작하면, 곡은 전혀 다른 깊이로 다가온다.

    2016년 8월 8일, ‘휘파람’과 ‘붐바야’ 두 곡으로 세상에 그 존재를 알린 블랙핑크.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거대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각종 차트를 석권했고, 신인답지 않은 파급력으로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SQUARE ONE]에 이어 [SQUARE TWO]로 걸음을 옮긴 그들은, 화려한 데뷔곡들과는 사뭇 다른 결의 곡으로 또 한 번 이목을 집중시켰다.

    ‘STAY’는 서정적인 기타 리프와 스트링이 어우러진, 애절한 감성의 컨트리 팝 곡이다. 강렬한 힙합 사운드로 세상을 뒤흔들던 그들이, 이번에는 한껏 힘을 빼고 가을과 어울리는 잔잔한 멜로디를 들려준다. 각 멤버의 개성 있으면서도 안정적인 보컬이 곡을 이끌며, 내 곁을 떠날 것만 같은 불안한 마음과 그럼에도 곁에 있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함께 담아낸다.

    ​

    화려함을 벗은 자리에 남은 것

    흥미로운 건, 세상을 압도하던 그룹이 부르는 노래의 정서가 이토록 연약하고 간절하다는 점이다.

    ‘STAY’의 화자는 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거친 말들에 상처받고, 사과 한마디 없이 또 혼자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그저 오늘 하루만은 떠나지 말아 달라고 청한다. 지금 당장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그저 내 곁에 머물러 달라고. 굳이 너여야만 하는 이유는 묻지 말라며, 이유조차 설명할 힘이 없는 마음을 그대로 내민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무대 위에서 혼자 빛나던 사람의 진짜 얼굴이 겹쳐 보인다. 세상이 세워둔 완벽한 상(像)을 벗어던진 자리에 남는 건, 결국 누군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이기 때문이다.

    ​

    어색한 침묵이 차라리 좋다는 마음

    이 곡에서 가장 마음을 울리는 대목은, 사람들과 나누는 억지스러운 한마디보다 너와의 어색한 침묵이 차라리 좋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수많은 관심과 환호 속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정작 화자가 원하는 건 화려한 말들이 아니라 진짜 한 사람과의 조용한 시간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관심 안 받고 편히 쉬고 싶은’ 마음과 정확히 맞닿는다. 세상 모두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조차, 실은 억지스러운 관계의 소음에 지쳐 단 한 사람의 진심 어린 침묵을 갈망한다는 것.

    거짓 같은 세상 속에서 유일한 진실이 ‘너’라고 노래할 때, 그 고백은 사랑 노래를 넘어선다. 그것은 완벽해야 한다는 세상의 요구에 짓눌린 한 인간이, 나를 스타가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 봐줄 단 한 사람에게 건네는 편지처럼 들린다.

    ​

    밉지만 사랑한다는 역설

    ‘STAY’는 결코 아름답기만 한 관계를 그리지 않는다. 화자는 상대를 밉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달콤한 향기를 죄(felony)에 빗대고, 슬픈 멜로디가 자신을 울린다고 말한다.

    이 모순이야말로 인간관계의 진실이다. 미움과 사랑이 깔끔하게 나뉘지 않고 한 마음 안에 뒤엉켜 있는 것. 완벽하게 정제된 감정이 아니라, 밉고 불안하고 그럼에도 놓지 못하는 이 뒤죽박죽의 마음이 오히려 가장 인간적이다. 어둠이 밀려올 때 내가 너의 불이 되어주겠다는 다정한 다짐이, 바로 그 뒤엉킨 마음 위에서 피어난다는 점이 이 곡을 더욱 애틋하게 만든다.

    ​

    존중받아야 할, 한 명의 사람

    결국 ‘STAY’는 곁에 있어달라는 한 편의 사랑 노래이자, 화려함 뒤에 가려진 인간의 연약함을 비추는 거울 같은 곡이다.

    혼자 빛나는 사람일수록, 그 빛의 크기만큼 곁의 온기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무대 위의 누군가에게 완벽함을 요구하며 실망하기 전에, 한 번쯤 떠올려야 할 사실이 여기에 있다. 그 사람도 떠나갈까 불안해하고, 조용히 곁을 지켜줄 누군가를 바라는, 우리와 똑같은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니 ‘STAY’가 건네는 그 나직한 부탁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건네야 할 말인지도 모른다.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라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너로 내 곁에 머물러 달라고.